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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NIS official: South tried to release terrorist

“범인 강민철 송환, 햇볕정책 때문에 포기”
July 27,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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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0월 9일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을 앞두고 북한 공작원들이 설치한 폭발물이 터져 건물 뼈대만 남은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묘소(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사건 직후 부상당한 채 체포된 북한 테러범 강민철(2008년 사망)의 모습. [중앙포토, 연합뉴스]
The Kim Dae-jung administration considered winning the release of a North Korean terrorist serving a life sentence in Myanmar for the 1983 Rangoon bombing on humanitarian grounds and bringing him to South Korea a free man before dropping the idea, Seoul’s former vice intelligence chief revealed in a recent interview.

In a recent interview with the JoongAng Sunday, Ra Jong-il, vice director of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in the 1998-2003 Kim administration, said he visited Myanmar beginning in 1998 and contacted Burmese officials to study the possibility of freeing and bringing Kang Min-chol to the South.

Kang was one of three North Korean agents responsible for the Oct. 9, 1983, assassination attempt on Chun Doo Hwan, then the president, who was visiting the then-Burmese capital.

The bomb exploded minutes before Chun arrived on the scene, killing 17 South Korean government officials including ministers, top presidential secretaries and four Burmese.

One North Korean agent was killed, and two others including Kang were arrested and sentenced to death. While one agent was hanged, Kang’s sentence was reduced to life imprisonment after he confessed that he was an agent. Kang died in prison after 25 years, succumbing to liver cancer in 2008 at the age of 53.

“I had continually seen Kang Min-chol since 1998 with the cooperation of Myanmarese authorities and secured the full accounts of the Aung San terrorist incident,” Ra said, referring to the bombing. The bombing is called “Aung San terror” in Korea as the attack took place near the tomb of Aung San, the country’s revered independence activist who was the father of Nobel Peace Prize laureate Aung San Suu Kyi.

“The Myanmarese side also indicated that it could release Kang Min-chol,” Ra said.

Yet Ra said Kang’s release was not further pushed because of two major concerns of the Kim administration.

“First, it was out of concern over its negative impact on the Sunshine Policy in South Korea [by reminding the public of the North’s past provocations], and second, it was out of concern that Kang’s release in the South could trigger North Korean claims that the terrorist attack was crafted by the South to ensnare the North,” Ra said.

The North denies both that it was behind the bombing and that Kang was its agent.

“South and North Korean authorities were emphasizing national unity [during the Sunshine Policy], but no one paid attention to a man who had been incapacitated and incarcerated in a foreign land,” he said.

Because of poor conditions in Myanmar, Ra said that he wanted to see Kang released to a third country if bringing him to the South would be too difficult. But possible third countries, including Australia, were not willing to accept Kang, he said.

Ra said Kang had been well aware that he was a “stateless person” not just politically but also psychologically. Kang told Ra that he felt betrayed by the North.

“Kang Min-chol tried to escape until the moment he was captured. He had believed that if he reached the place he was ordered in advance to go, a boat would take him home,” Ra said. “But, there was no boat.”

Kang lost an arm and suffered severe permanent injuries before being arrested. As police pursued Kang in close range after the attack, he tried throwing a grenade at them, but it exploded immediately, blowing off Kang’s left arm. The grenade was designed to explode immediately after its pin was pulled, Ra said.

“Kang told me that at the very moment the grenade exploded he knew his country had betrayed him, and that’s why he confessed that he was a North Korean spy,” Ra said.

Ra said he felt guilty that he could not win Kang’s freedom even after he retired from government. Although he would have always been a heinous terrorist, Kang was also a victim of Korea’s division, Ra said.

“By disclosing this, I want to ask forgiveness to those abandoned and forgotten by their states,” he said.


By Yeh Young-june [joe@joongang.co.kr]

한글 관련 기사 [중앙선데이]
“범인 강민철 송환, 햇볕정책 때문에 포기”

라종일 전 국정원 차장이 밝히는 ‘아웅산 테러 비화’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국가정보원(국정원)이 김대중 정부 당시인 1999년 미얀마 현지 교도소에서 장기 수감 중이던 북한 특수공작원 강민철의 한국 송환 방안을 검토했고 미얀마 정부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으나 남북 관계에 악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포기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국정원 1차장이던 라종일 전 주일대사는 “강민철은 테러를 지시한 북한으로부터 버림받았고 한국 정부도 대북 관계를 고려해 그를 외면했다”며 “북한 정권의 죄악상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한국 정부도 한편으론 인권을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론 분단의 피해자인 한 젊은이를 외면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라 전 대사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강민철을 한국에 데려오거나 제3국에서 살게 하지 못한 데 대해 공직을 그만둔 뒤에도 끊임없이 자책감을 가져왔고 이런 사실을 공개해 국가 권력에 희생된 사람들에게 속죄하고 싶다”고 말했다.

강민철은 북한 지령에 따라 1983년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폭탄을 터뜨렸고 한국 고위관료 등 21명이 사망했다. 강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자신이 북한 공작원임을 자백한 점이 참작돼 사형집행이 보류됐었다. 그러나 석방이 좌절된 뒤 25년간 복역하다 2008년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중앙SUNDAY는 강민철과 아웅산 테러 비화에 대한 라 전 대사의 수기를 세 차례 연재한다. 라 전 대사는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 1차장과 주영대사를 지냈다. 노무현 정부에선 청와대 안보보좌관(장관급)과 주일 대사를 역임했다.


라 전 대사는 수기를 책으로도 펴낼 생각이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테러범 강민철에 대해 왜 관심을 갖게 됐나.
“강민철은 흉악한 테러범이다. 큰 죄를 지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분단상황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남한도 간접 책임이 있다. 북한은 광주사태 이후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저항감이 팽배해 그를 제거하면 남한에서 혁명적 상황이 연출될 것으로 본 것 같다. 어떤 탈북자의 말처럼 북한에서 태어난 게 원죄인가. 구체적으로 강민철을 챙겨보기 시작한 건 1998년 국가안전기획부(이듬해부터 국정원으로 개편) 1차장이 되면서부터다. 정보교류차 미얀마를 방문하게 됐는데 미얀마 고관들 중 내가 영국 유학을 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한국에서 갈 때부터 어떻게든 강민철을 도와주겠다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꺼내주고 싶었다. 미얀마 2인자이자 정보부장인 3성장군 킨 윤을 만난 자리에서 강민철의 면회 허용을 부탁했다. 그는 이전 15년 동안 일체의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었다. 우리 대사관 직원이 처음으로 강을 만났고 라면과 김치 같은 위문품을 전달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강민철의 반응이 뭐였나.
“남과 북 모두에 대해 증오심에 차 있었다. 자기 일생이 망가졌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는 모국어를 15년 만에 해본 것이다. 대사관 직원에게도 순순히 마음을 열지 않았으나, 결국 하소연이든 욕이든 15년간 가슴속에 쌓아둔 채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얘기를 실컷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리 직원이 김치도 넣어주고 영치금도 넣어주면서 여러 번 면회를 하는 동안 강민철은 마음을 열고 나중에는 나이를 따져보더니 ‘형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진모 소좌란 사람이 3인조 공작팀의 리더였는데 강민철과는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아웅산 묘지 현장에 폭발물을 설치한 뒤 강민철은 쉐다곤타워(양곤 시내의 높은 불탑)에서 현장을 내려다보며 터뜨리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진 소좌가 쉐다곤타워는 관광객이 많아 들키기 쉬우니 주변 공장 앞에서 기다리다 터뜨리자고 했고, 거기에 갔다가 사람들이 의심하는 바람에 극장 앞으로 옮겨가 폭탄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현장이 잘 안 보이는 상황에서 나팔 소리만 듣고 전 대통령이 온 줄 알고 폭탄 버튼을 누른 것이다. 만일 진 소좌가 강민철의 의견을 따랐더라면 전 대통령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감옥생활을 했다고 하던가.
“늘 고향에 돌아가 사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게 자기가 자백해 가족이 고통 받을 거란 걱정이었다고 한다. 그는 여자 손목 한 번 못 잡아본 숫총각이라고 고백하면서 누이동생을 미리 결혼시키지 못한 것, 장남으로서 부모한테 효도하지 못한 걸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특수부대는 출세코스다. 차관급과 맞먹는 월급을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체포 과정에서 수류탄이 터져 하루아침에 불구가 됐고, 하루 두 끼 쌀밥과 카레 혹은 삶은 채소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그런 악조건에서 25년을 버틴 건 대단한 정신력일 것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버텨서 남이건 북이건 제3국이건 어디든 한국말을 쓰는 동포가 있는 곳에 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미워하면서도 동포를 그리워한 것이다.”

-강민철을 석방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수사에 협조해 집행이 유예된 상태였다. 미얀마 정부도 그를 풀어줄 의사가 있었다. 우리 정부도 그를 데려오는 문제를 검토했다. 두 가지 이유로 성사되지 않았다. 첫째 우리가 데려오면 북한이 ‘아웅산 사건은 남한의 조작임이 드러났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이미 미얀마(사건 당시엔 버마) 정부의 수사로 진상이 완전히 드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정당한 이유가 아니었다. 둘째는 남북 관계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던 햇볕정책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정부가 안 움직이기에 평소 친분이 있는 극동방송 회장인 김장환 목사에게 교섭을 부탁했었다. 2000년대 초에 김 목사가 미얀마로 가 강민철의 석방을 교섭했다. 그쪽에선 정부 차원의 요청이라면 몰라도 민간인에겐 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꼭 한국으로 데려오자는 것도 아니었다. 제 3국에라도 가서 치료도 받으면서 단 하루라도 자유롭고 사람답게 살게 해 주고 싶었다. 한 번은 호주 정부 관리와 식사를 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얘기를 꺼낸 적이 있는데 부담스럽다고 하더라.”

-남북관계에 걸림돌이 된다는 게 사실상의 이유였던 건가.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강민철을 석방시켜도 남북관계나 햇볕정책에 대한 영향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게 있다. 북한이 햇볕정책에 응한 건 북한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지 우리의 진심을 보고 응한 게 아니다. 내가 접했던 정보를 공개할 수 없도록 돼 있기 때문에 자세히 밝히기 힘들다. 하지만 북한이 아무런 전략 없이 햇볕정책에 응한 건 아니었다. 북한은 햇볕정책 덕분에 대남정책에서도 상당히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6·15 선언이 여러 가지 긍정적인 면이 있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순수한 마음에서 햇볕정책을 접근했을지 몰라도 북한이 같은 마음이라고 보긴 힘들다.”

-결국 남북한 정부 모두가 강민철을 버린 셈이다.
“자기들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는데 사람 하나의 운명이 어떻게 되건 뭐가 문제냐는 사고방식이 문제다. 미국은 북한에 억류된 자국민 한 명 때문에 전직 대통령이 체면을 구겨가면서 들어가서 결국 데려오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에겐 사람의 문제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강민철의 얘기를 왜 이제 하는 것인가.
“2008년 그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장례도 없이 화장했다고 한다. 그로써 강민철은 남과 북에서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강민철이 살아있을 때 남북 정부는 수없이 접촉하고 만났는데 한번도 강민철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민족 화합을 얘기하던 햇볕정책 때도 마찬가지였다. 분단체제의 희생자인 그를 평생 이국의 감옥에서 살다 죽게 하면서 통일과 화합을 얘기하는 건 비극이다. 우리 민족의 엄청난 업보가 있다.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민족이 사람 하나의 목숨을 쉽게 안다는 걸 지적하고 싶었다. 현실에선 잊혀졌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라도 되살려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동기는 전혀 없다. 사람의 문제를 부각시키려는 것뿐이다.”

-북에서도 강민철은 잊혀진 존재인가.
“전해 들은 얘기지만 강민철의 상관들은 동정은커녕 ‘바보 같은 놈, 일 처리를 잘 못해 놓고 붙잡히기까지 했다’며 비난했다고 한다. 강민철은 마지막까지 탈출하려 했다. 특수훈련을 받은 그는 미얀마 군인의 추적 정도는 우스웠을 것이다. 약속한 곳으로 가면 보트가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을 조국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보트는 없었다. 강민철은 수류탄이 터져 한쪽 팔이 잘리고 온몸이 불구가 된 채 붙잡혔는데 자살하려던 게 아니다. 수류탄 핀을 뽑고 안전 버튼을 잡고 있으면 터지지 않는데 바로 터져버렸다는 것이다. 강민철은 그때 ‘아, 조국이 날 죽여버리려고 이런 수류탄을 지급한 거구나’하고 배신감을 느꼈고 그래서 자신이 북한 공작원임을 자백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요직에서 일했는데 스스로를 진보 학자라고 생각하나.
“나는 그런 분류를 거부한다. 개인적으론 급진적이기도 하고, 보수적이기도 하고, 때론 리버럴하다. 권력의 논리를 알고 체득할수록 진보나 보수의 한쪽으로 가기 힘들다. 발자크는 큰 부(富)의 뒤엔 반드시 범죄가 있다고 했다. 큰 권력의 뒤는 더 심하다고 생각한다. 마키아벨리도 말했듯 권력은 신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이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아마도 이명박 정부가 과거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180도 선회한 데 대한 경고이겠지만 더 큰 이유는 다음 정권에 대한 경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정권에 대해서 우리한테 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강민철 이야기를 증언하면서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가.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틀린 얘기다. 권력은 총구가 아니라 결국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 나온다. 햇볕정책도 단순히 정치적 어젠다로 접근하면 안 되고 휴먼 어젠다로 가야 한다.”